조선 시대를 살아간 주체적인 여성들: 「孀女」와 「劒女」, 그리고 황진이
조선 시대는 ‘삼종지례(三從之禮)’와 같은 엄격한 유교적 윤리와 봉건적 관습이 지배하던 사회였습니다. 여성들은 한평생 아버지 → 남편 → 아들에게 ‘종속’되어야 했고, 가문과 가문을 연결하는 혼인을 통해 개인적 삶은 뒷전이 되기 일쑤였죠. 그러나 당시에도 스스로의 의지로 삶을 개척하고, 봉건 사회의 굴레를 거부한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두 편의 고전 설화 「孀女(황녀)」와 「劒女(검녀)」, 그리고 자유로운 기상으로 유명한 황진이를 통해 **‘조선시대 여성의 주체적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1. 「孀女(황녀)」: 개가(改嫁) 금지 시대를 넘어선 아버지의 선택
1) 개가를 금지하던 조선의 법과 관습
조선 후기, 여성의 재혼(개가)은 극도로 금기시되었습니다. 특히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어 남편을 여의게 되면, 사실상 평생을 청상과부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조선 법과 관습의 엄중한 ‘이(理)’였죠.
그런데 「孀女」 이야기에 등장하는 재상(宰相)은 자신의 딸이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평생을 외롭게 지내게 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재상은 딸의 장례를 **‘위장(僞裝) 자살’**로 꾸며 사회적 규범(개가 금지)을 우회하고, 몰래 딸을 다른 남자(무관)에게 시집보냅니다. 딸은 북관(함경도)으로 떠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아 잘 살게 되죠.
2) 당시 관점 vs. 현대 관점
- 당시: 재상은 국법과 사회 기강을 수호해야 하는 최고위 관직자이면서도, 개인의 ‘정(情)’을 앞세워 딸의 개가를 추진한 ‘일탈 행위’를 저지릅니다. 이는 명백히 실정법을 어긴 것이기에, 사회적으로는 문제 삼을 만한 큰 사건이었습니다.
- 현대: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부성애(父性愛)’와 ‘인간애(人情)’가 드러난 아름다운 결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도 재상은 이 일을 극비로 진행하고, 훗날 암행어사로 함경도에 간 아들마저도 입을 닫게 만드는 등, 자신의 선택이 법적·사회적 모순을 지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핵심 포인트
개가 금지를 어겼다는 사실만 보면 엄청난 불법이지만, 그 근저에는 **‘인간다움’**과 **‘부모로서의 애틋한 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여성의 재가(再嫁)에 대한 시각이 조금씩 변화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그 변화를 미묘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2. 「劒女(검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호쾌한 여성
1) 검술을 익힌 여종의 이야기
안석경(安錫儆, 1717~1774)의 《삽교별집(霅橋別集)》에 전해지는 「劒女(검녀)」는 남장(男裝)을 하고 세상을 떠돌며 무예를 익힌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본래는 주인댁의 여종이었으나, 주인집이 멸문(滅門)당하자 주인 아가씨를 따라 검술의 스승을 찾아 떠나고, 복수에 성공합니다.
그 후 검녀는 삼남(三南)에서 명망 높았던 소응천이라는 인물을 찾아가 첩이 되는데, 살다 보니 그가 소문만큼의 ‘기사(奇士)’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게 거침없는 충고를 남기고 떠나 버리죠.
2) 파격적인 충고와 칼춤
검녀는 떠나기 전날, 소응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재주는 문장, 점, 역술 같은 작은 기술에 불과합니다. 세상을 다스려 후세에 모범이 될 큰 도(道)는 아직 모르십니다. 지금은 혼란한 시대라 ‘실상보다 과한 명성’을 얻었다가는 화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칼춤을 보여 주는데, 공중을 나르듯 휘어잡으며 나무를 단숨에 베어 버리는 장면은 압권입니다. 낭자한 피를 부른 것은 아니지만, 칼끝이 번개처럼 사방을 가르는 모습은 곧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롭고 호쾌한 여성”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3) 자발적으로 떠나는 여성
칼춤을 마친 후, 검녀는 말술(斗酒)을 권하며 다음 날 새벽에 떠납니다.
“어찌 다시 여자가 되어 음식과 바느질 일에 얽매여 살겠습니까? 나는 남자로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마음이 맞는 기사(奇士)가 아니라면 주종(主從)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이처럼 검녀는 전통 사회의 여성상—집안일에 매인 ‘현모양처’—을 완전히 거부합니다. 남성에게 예속되지 않고, 자기 의지와 기개(氣槪)에 따라 세상을 활보하는 인물이었죠.
3. 황진이: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기상
1) 명기(名妓)에서 자유인으로
황진이(黃眞伊)는 송도의 명기로 유명하지만, 여러 고전 야담을 살펴보면 “자유로운 영혼”임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譚)》에는 황진이가 재상가의 아들 이생(李生)과 함께 초라한 베옷 차림으로 금강산 곳곳을 떠돌며 걸식하고, 때로는 중들에게 몸을 파는 듯한 연기로 음식을 얻는 등, 세상의 모든 격식과 위계를 벗어난 ‘파격’이 담겨 있습니다.
2) ‘계약 결혼’까지 시도한 황진이
또 다른 일화에서는 이사종이란 선전관과 6년 기한으로 ‘계약 결혼’을 합니다. 그녀는 3년은 자신의 재산을 이사종 집안에 쓰고, 이후 3년은 이사종이 자신의 일가를 돕게 하며 살림을 꾸립니다. 기한이 다 되자 약속대로 쿨하게 떠나 버리죠. 혼인을 ‘집안과 집안의 결합’으로만 보던 시절, 황진이는 사랑과 결혼마저도 자신의 방식으로 살았던 독특한 여성상입니다.
4. 조선 후기 여성상: ‘정(情)’이 ‘이(理)’를 넘어선 순간
- 개가 금지를 어기고 딸을 재혼시킨 재상의 이야기(孀女)
- 법과 규범을 어긴 ‘일탈’이지만, ‘인간다움’과 ‘부성애’가 녹아 있음.
- 남장으로 무예를 익히고 자유롭게 떠난 검녀(劒女)
- 여성이 가문의 복수까지 해낸 뒤, 자신의 삶 역시 주체적으로 설계하는 모습.
- 황진이의 파격 행보
- 금강산 여행, 계약 결혼 등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기상.
이 세 이야기는 모두 조선 후기 사회에서, 여성의 일탈적·주체적 행동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동시에 “남성 중심 봉건사회 속에서도 자기 의지를 지키는 여성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5. 봉건사회를 뛰어넘은 여성의 ‘주체적 삶’
봉건 시대라고 해서 모든 여성이 단순히 남성의 부속물로만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사회의 제도와 법률이 여성들에게 극도로 불리했지만, 그 틀을 넘어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 「孀女」 속 재상 딸의 재혼은 법을 어겼으나 인정을 실현했습니다.
- 「劒女」 속 검녀는 자신의 주인 아가씨를 도와 복수한 뒤, 자유로운 삶을 찾아 떠났습니다.
- 황진이는 기생이라는 굴레 속에서도 자유로운 사랑과 여행을 즐기며, 누구의 예속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가부장제의 한계를 극복한 페미니즘적 인물’로 볼 수도 있는 이들 이야기는, 조선 후기 사회상이 변화하는 모습을 생생히 전해 줍니다. ‘개가 금지’라는 제약을 과감히 뚫거나, 남장을 하고 활보하며, 자기 삶을 온전히 책임지는 여성상은 그 자체로도 매력적인 서사입니다.
이러한 문학 작품을 통해 우리는 **“당시에도 자신을 지키기 위한 용기 있는 여성들이 분명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 본연의 존엄과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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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어우야담(於于野譚)》, 유몽인(柳夢寅)
- 《삽교별집(霅橋別集)》, 안석경(安錫儆)
- 관련 고전 설화 「孀女(황녀)」, 「劒女(검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