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의 격랑 속에서 갈린 선택
1) 세조의 왕위 찬탈과 두 갈래 길
- 서거정: 수양대군(세조)에게 협력하여 원종공신에 오르고, 이후로도 정치적 승승장구를 이어갑니다. 그는 대제학, 예문관·집현전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관각(官閣)의 중심 문인”으로 활약했습니다.
- 김시습: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폐위되자 이를 불의라고 여기고 모든 책을 불태운 뒤, 승려 복색으로 전국을 유랑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절의(節義)**를 지켰다는 평가를 받지만, 현실에서는 벼슬길이 막혀 오랜 궁핍과 방황을 겪었습니다.
이처럼 하나의 사건(세조 찬탈)이 **“충(忠)”과 “출세(出世)”**라는 상반된 가치 사이에서 전혀 다른 삶의 궤도를 만든 것입니다.
2. 천재적 재능, 그리고 스승 이계전(李季甸) 문하
두 사람은 모두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 서거정은 여섯 살 때 이미 글을 지어 이름을 떨쳤으며, 세종 연간에 생원시·진사시에 잇달아 합격하고 마침내 문과에 급제합니다.
- 김시습 또한 두 살 무렵부터 글을 지었다는 전설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세종이 “그 재능을 크게 쓰겠다”며 궁중에 불러들인 적도 있을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당대 최고 학자인 이계전(이색의 손자, 권근의 외손)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수학(同門修學) 관계였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만약 세조 찬탈이라는 정치적 격랑이 없었더라면, 둘 다 조정에서 함께 문한(文翰)을 주도하며 비슷한 길을 걸었을지도 모릅니다.
3. 엇갈린 삶의 풍경
1) 서거정의 화려한 관각 생활
- 왕명으로 편찬한 저작들:
- 『경국대전』(1469)
- 『삼국사절요』(1476)
- 『동문선』(1478)
- 『신증동국여지승람』(1481)
- 『동국통감』(1485)
등 법전·역사·지리·문학 분야에 걸쳐 무려 9종, 수백 권에 달하는 방대한 편찬사업에 기여했습니다.
- 대제학으로서 23년간 조선 문단의 **문병(文柄)**을 잡았고, 인맥과 권위를 바탕으로 많은 문인과 교유하면서 풍류와 잔치를 즐겼습니다.
- 개인 시문도 매우 풍부하여, 현재 전하는 작품만 해도 6,000수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시에는 화려하고 풍족한 생활과 유유자적한 사대부의 정취가 짙게 배어납니다.
2) 김시습의 방랑과 생육신의 길
- 책을 불태우고 승려 행색으로 떠돌며 관서·관동·호남 등 전국을 유람합니다.
- ‘수양대군의 불의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평생 벼슬을 마다했으며, 간혹 서울에 되돌아와 벼슬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 각지의 산사(山寺)에 은둔하였으며,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시(詩)와 학문을 놓지 않았고, 평생 100편 이상의 작품을 서거정과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 마지막에는 충남 부여의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이러한 처절한 삶은 그의 문학 작품 특히 **『금오신화』**에 고스란히 반영됩니다.
4. 화려함 vs. 치열함: 시(詩) 세계의 대비
두 인물 모두 시와 술을 무척 사랑했으나, 그 시세계는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 서거정의 시
- 귀족적 정감과 대각적(臺閣的) 성세 찬양이 주를 이룸
- “한가로운 풍류” “포즈로서의 귀전(歸田) 의식” 등 여유로움이 가득
- 화려한 이미지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전통적 작시(作詩) 법칙도 대범하게 넘어서는 모습을 보임
- 김시습의 시
- 불의한 현실에 대한 울분과 자기 연민이 짙게 배어 있음
- 백성의 고단함을 바라보며 분노하는 시편이나, 인생의 허무와 고독을 노래하는 작품이 다수
- 어떨 때는 절의(節義)를 지키지 못하는 세상을 조롱하고, 또 어떨 때는 방황하는 자기 자신을 한탄
- 그야말로 치열한 내면 세계를 치솟는 감정으로 표현
둘의 시를 나란히 읽어보면, 한 명은 “궁궐과 연회” 속 화려함을, 다른 한 명은 “초가와 방랑” 속에서의 치열함을 담았다는 사실을 뚜렷이 체감하게 됩니다.
5. 웃음과 화락 vs. 비극적 정조: 『태평한화골계전』과 『금오신화』
조선 초에는 오늘날 “소설”에 가까운 필기류·패설류가 한때 성행했는데,
- 서거정은 **『태평한화골계전』**을 통해 골계(滑稽)·우스갯소리를 잔뜩 담아 **“웃음과 화락”**을 지향했습니다.
- 김시습은 **『금오신화』**를 지어, 주인공들이 죽음 또는 은둔으로 귀결되는 비극적 세계관을 형상화했습니다.
이처럼 두 저작은 모두 당대에는 **“소설(稗說)”**로 불렸지만, 그 내용과 기조가 전혀 달랐습니다. 서거정은 “우스갯소리를 통해 세상을 즐겁게” 하고자 한 반면, 김시습은 **“이상 세계”**와 **“환신(幻身)의 경험”**을 통해 현실의 불합리성을 폭로하고 고독과 울분을 표출했습니다.
6. 죽어서도 엇갈린 평가: 잊힌 자와 되살아난 자
1) 서거정: 점차 잊힌 인물
- 생전에는 화려한 관각파 문인으로 추앙받았으나, 사림(士林)이 정계의 주도권을 쥔 16세기 이후에는 세조에 협력했다는 점과 관각적 문체 때문인지 점점 부정적인 평가가 늘어갑니다.
- 『조선왕조실록』 성종 19년 서거정 사후(死後)의 기록에서조차, “그릇이 좁고 후진들을 배려하지 않았다”라는 매서운 평가가 등장합니다.
2) 김시습: 후대에 높이 추앙
- 생전에는 권문세가와 학맥·혈연으로 연결되지 못해 변방의 인물처럼 취급받았습니다.
- 그러나 명분과 절의를 중시하는 사림파가 중앙 권력을 잡으면서, “김시습의 **절의(節義)**가 바로 진정한 선비 정신”이라는 기류가 퍼지기 시작합니다.
- 중종 때부터 그의 유고를 수습해 간행하자는 상소가 올라오는 등, “김시습 되살리기”가 본격화되었고, 결국 정조는 김시습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청간공(淸簡公)”**이란 시호를 내립니다.
결국 **“서거정”**은 살아서 큰 공훈을 남겼음에도 사림 시대에 맞지 않아 점점 잊히고, **“김시습”**은 생전의 고난에 찬 삶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명분론 속에서 되살아난 역설적 평가가 이어진 것입니다.
격변이 만든 두 초상,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
조선 초, “계유정난”을 기점으로 갈라졌던 서거정과 김시습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 시대적 흐름 앞에서 “나 자신은 어떤 가치를 지키며 살아갈 것인가?”
- **“재능”과 “출신”**이 뒤엉킨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도, 결국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양심과 의지라는 점.
-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든, 절의와 신념을 붙들든, 역사가 보는 평가와 개인의 삶이 어긋날 수 있다는 사실.
화려함 속에서 달콤한 시를 노래했던 서거정이나, 방랑으로 점철된 고독 속에서 절의를 지켰던 김시습이나 모두 조선 초 문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오늘날 새롭게 이해하고 되살리는 일은, 역사의 격변 속에 자신의 길을 고민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도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 서거정(徐居正), 김시습(金時習)
- 조선 전기 사대부 문인, 생육신, 세조 찬탈(계유정난)
- 대제학, 동문선, 금오신화
- 태평한화골계전, 관각파, 방랑
- 절의, 명분, 사림파